- 우수 어린 전도연의 고혹 연기, 박해수의 묵직한 울림 연기
- 배우 10명의 개성을 살린 집단 앙상블로 몰입감 높여
- 삼각형 2층 집과 경사진 계단, 루프탑까지 무대로 활용
- 전방위 시야와 동시다발 대사 등 신선한 연출기법 선보여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1300여 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150분(인터미션 포함)간 삼각의 유리집에서 펼쳐지는 재벌가의 몰락 과정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외국 연출가가 각색하고 연출한 작품이지만, 우리 이야기를 우리 배우들이 우리 정서로 연기하고 있어 초연이지만 스토리텔링을 이해하고 매혹적인 무대 아우라에 빠져든 것이다.
필자는 안톤 체홉이 1904년 러시아를 배경으로 쓴 ‘벚꽃동산’을 사이먼 스톤이 2024년 어떻게 서울 버전으로 재창작했으며, 톱스타인 전도연과 박해수 배우가 어떤 연기를 펼칠지 궁금해 서둘러 예매를 했는데, 1막 초입부터 무대에 빨려들었고, 3막과 4막에서는 뭉클한 감동까지 체험했다.
세계에서 가장 핫하다는 올해 40세의 호주 출신 연출가 사이먼 스톤은 체홉의 온기와 작품의 구조만 남긴 채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한 ‘벚꽃동산’을 재창작, 전방위(全方位) 시선과 동시다발 대사 등 독창적 기법으로 무대에 올렸다.
LG아트센터 서울 시그니처홀에서 6월 4일 개막해 7월 7일까지 공연하는 사이먼 스톤 연출의 ‘벚꽃동산’은 이제까지 국내에서 해온 원전 공연이나 번안 작품과는 전혀 결이 다른, 120년 전 상황을 현재 시점으로 옮겨 재창작한 한국판 초연이라는 점에서 개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낯설 수도 있는데 이야기에 공감이 갔고, 더욱이 체홉이 강조한 희극과 비극을 공존시켜 재미를 안겨 주었다. 공연 내내 객석에 자주 웃음이 터졌지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밀려난다는 예리한 메시지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한국판 ‘벚꽃동산’은 희극이면서 비극이다

영화감독이자 연극 연출가인 사이먼 스톤은 고전 작품을 그 나라 현실을 바탕으로 맞춤형으로 각색해 세계 여러 대도시에서 공연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한국을 답사했다는 그는 고전의 현재적 재해석 작품으로 체홉의 ‘벚꽃동산’을 택했다. 그가 한국을 어떻게 보았고, 무엇을 말하기 위해 이 텍스트를 택했을까.
아마도 그는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기생충’에서 계층 간의 갈등을 보았을 것이다. 이념적 대립, 정치 사회적 혼란에 경제적 불평등부터 젠더 문제까지, 성장과 변화의 그늘에 가려진 불안감을 본 것은 아니었을까. 스톤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한국 사회를 담을 수 있는 작품”이라며 “한국판 ‘벚꽃동산’은 희극이면서 비극이다”라고 했다.
이현정 총괄 프로듀서는 인사말에서 “한국 사회가 이룬 급격한 변화와 발전,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변화를 이끌어 가려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 계층과 세대의 충돌, 그 안에서 분출되는 사람들의 에너지 등이 체홉이 ‘벚꽃동산’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고 스톤 연출의 말을 전했다.
사이먼 스톤의 ‘벚꽃동산’은 건축으로 말하면 재건축까지는 아니고 뼈대만 남긴 리모델링이라고 할 수 있다. 체홉의 원작은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억눌린 민중의 불만과 기득권층의 불안을 예리한 시선으로 담아내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고 있다. 지주의 후손들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신흥계층은 혁명을 외치지만, 그 시대를 사는 결핍과 연민을 지닌 인물들의 희비극적 일상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파산 위기의 韓 재벌가 스토리

사이먼 스톤은 한국 버전에서 몰락한 지주 대신 파산 위기를 맞은 한국 재벌가의 이야기로 바꿨다. 인물들도 원작과 유사한 점이 있지만 현재를 사는 한국인들이다.
지주의 딸 라넵스카야(류바)는 아들을 잃은 상처를 안은 채 과거에 묻혀 사는 캐릭터인데 여기서는 뉴욕에서 5년 만에 돌아와 술로 버티면서도 끼와 매력은 여전한 송도영을 전도연 배우가 고혹적으로 연기한다.
류바의 오빠이자 가문의 장자인 가예프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날로그 세대의 고장난 벽시계 같은 캐릭터 송재영으로 바꿔 손상규 배우가 개성 있게 연기한다. 몰락한 지주 시네오노프피시크 역은 놀고먹는 사촌 김영호로 설정해 유병훈 배우가 연기하는데, 손상규와 더불어 넉살 연기로 관객을 웃겼다.
체홉의 ‘벚꽃동산’에서 중심인물은 농노 출신의 상인 로빠한이다. 이번 무대에서는 선대 회장을 모시던 운전기사의 아들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황두식으로 설정, 연기파 박해수 배우가 중심을 잃지 않고 열등 의식과 야망의 이중성을 강렬하게 펼쳐냈다.
원작의 수양딸 바랴는 입양된 딸이자 회사의 부사장인 강현숙으로 바꿔 최희서 배우가 맡았다. 류바의 친딸 아냐 캐릭터는 송도영의 핏줄인 둘째 딸 강해나로 변신시켜 이지혜 배우가 신세대 연기로 해냈다.
원작의 만년 대학생 페짜 역은 세 번째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변동림으로 설정해 연극 ‘코리올라누스’에서 열연한 남윤호 배우가 개성과 패기 넘치는 열정 연기를 보였다.
스톤 연출은 원작의 하녀 두나샤를 가정부 정두나(박유림 배우), 젊은 하인 야사를 운전기사 신예빈(이세준 배우)으로 바꾸고 송도영의 개인 비서 이주동(이주원 배우)과 MZ세대의 삼각관계 연애 풍속도를 그려냈다.
체홉의 ‘벚꽃동산’에서 연기파 배우들이 인상적 연기를 펼쳐온 늙은 하인 파르스는 이 작품에 나오지 않는다.
루프탑 등 3개층 활용·동시다발 대사 등 차별화된 연출 기법 돋보여

스톤의 한국판 ‘벚꽃동산’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연출의 특징은 무엇일까.
세계적 수준의 공연장 LG시그니처홀의 초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각 포인트는 삼각 구도의 하얀 집이다. 2층 구조로 전면은 투명 유리로 설치되어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고, 삼각형의 한쪽 면은 가파른 계단으로 처리되어 불안감을 조성한다.
1층은 거실로 주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2층은 침실이자 은밀한 장소다. 가장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곳은 삼각형 밑변이 계단과 닿아있는 아래층 비좁은 구석이다. 송도영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수세에 몰리거나 삶의 아픔이 전율을 일으킬 때 이 공간으로 파고든다.
가구들은 한 가족의 보금자리로 세심하게 배치되어 안온감을 주다가 황두식이 파산한 회사를 사들이자 순식간에 철수되어 빈 공간이 돼버린다.
“전부 다 부숴버려. 새로운 시대가 올 거야. 오늘이 시작이야.”
안전모를 쓰고 공사를 시작하는 황두식 뒤로, 귀를 찢는 EDM 전자음향이 고막을 찢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야릇한 감정이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이 연극의 하이라이트였다.
서울판 ‘벚꽃동산’의 상징물이자 굿즈로도 활용되는 이 삼각집은 무대디자이너 사울킴과 협력디자이너 멜 페이지, 김호연 프로덕션 매니저의 합작품이다.
흰색은 여러 상황들이 펼쳐지는 캔버스로 기능하며, 유리창을 통해 인물들의 삶을 훔쳐보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을 관객에게 안겨주었다.
사이먼 스톤 연출은 계단뿐 아니라 건물의 루프탑까지 무대로 활용했다. 등장인물들은 루프탑에 올라가 답답한 사연들, 외치고 싶은 속내를 쏟아냈다. 이때 무대에는 3개 층위의 미장셴이 펼쳐지는데, 스톤의 감각적 연출이 돋보이는 명장면이다.
다 포착하지는 못했지만 스톤 연출의 특징은 관객의 시선을 한 곳에 집중시키기보다 전방위로 확산하고, 화술 또한 주고받는 형식에서 벗어나 배우들이 여러 장소에서 동시다발로 대사를 치게 하는 등 기법이 독특했다. 이것은 기존의 연출 문법과는 다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연극은 배우들이 대사를 주고받고, 관객들은 연기자의 동선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스톤은 관객이 배우의 움직임이나 사건을 따라다니게 하는 게 아니라 무대 전체를 보게 하는 기법을 활용했다. 또한 여러 명이 동시에 대사를 치게 해 말들이 뒤섞여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데 그냥 떠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지게 해 결국은 관객이 자기가 원하는 배우의 대사와 보고 싶은 장면을 특정해 보도록 유도했다.
시선을 극대화하고 청각을 열어둠으로써 동시다발적 대사를 치게 하는 연출기법은 관객 입장에서 혼란스러우면서도 새로웠다.
하지만 마이크를 쓰는 무대에서 음향장비가 아무리 첨단이고 예민하다고 해도 소리가 나는 방향이 한정돼 있어 입체감이 떨어지는 것을 스톤 연출도 극복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였다.
사이먼 스톤의 연출은 배우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말하게 하면서 배우 개개인에게 한 번 이상의 독백이나 격정 연기를 펼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안배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가장 큰 미덕, 정서적 공감

스톤 연출은 두식(박해수)과 동림(남윤호)을 통해 자신이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주제와 메시지를 장황하게 펼쳐냈다.
도영(전도연)에게는 두 딸 현숙(최희서)과 해나(이지혜)와 맞붙는 대결 연기로 가슴 속 묵은 응어리들을 토해내게 했다.
재영(손상규)과 영호(유병훈)를 전통을 고집하는 시대착오적 캐릭터로 설정해 아재 개그 같은 웃음을 유발케 하면서도 그들의 순수성을 부각시켰다.
젊은 세대인 두나(정유림)와 주동(이주원), 예빈(이세준)의 가치관과 애정 행태를 삼각 구도로 도출시켜 기성세대와 대비시키면서 젊음의 싱그러움을 육체로 보여주기도 했다.
4막이 진행되는 동안 10명의 배우들이 집단 연기를 펼치는데도 배우들간의 연기 호흡과 앙상블이 조화를 이뤄낸 점이 필자는 특히 좋았다. 배우들이 자연스런 밸런스를 이뤄낸 석양 장면은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외국인인 사이먼 스톤이 마치 한국인이 쓴 창작극처럼 배우들을 통해 스토리를 끌어가고 정서적 공감을 안겨주었다는 점이다.
안톤 체홉의 여러 작품들과 수많은 버전의 ‘벚꽃동산’을 볼 때마다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부족한 점이 있었던 데 비해 스톤이 서울을 배경으로 재창작해낸 이번 무대는 배우들의 이름부터 캐릭터, 이야기의 내용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볼 수 있는 현재적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쉬웠고, 배우들의 대사와 감정선을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여기에 국내 무대에서 주저해온(자제해온) 정사 신(남윤호와 이지혜), 아들의 연인과의 키스 신(전도연과 남윤호) 등도 신박한 파격이었다.
회사와 집의 운명이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에서 유리집에선 왁자지껄한 딸 해나의 생일파티가 열린 3막에서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듯 검은 눈이 흩날리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그 눈이 하염없이 내려 무대 위를 검게 덮었을 때 관객의 감정도 다운될 수밖에 없었다.
무대 꽉 채운 전도연·박해수의 존재감

27년 만에 무대에 돌아왔다는 전도연은 아들을 가슴에 묻은 상처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다 기업의 몰락과 16세 생일 때 할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하얀집까지 내몰린 상황에서 술에 의존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연기를 월드 스타답게 고혹적으로 해냈다. 주인공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하나씩 풀어가는 의연함으로 잔잔하게 시선을 모아들인 전도연의 차분한 연기는 연민을 일으켰다.
필자가 이 연극에서 가장 주목한 배우는 황두식 역 박해수였다. 신분의 벽을 딛고 사업에 성공한 그는 어린 시절 어미새 같았던 송도영과 기업 대표 송재영에게 진심으로 위험을 알리지만 그들은 “잘 해결될거야. 우린 지금껏 그래왔어”라는 안일한 자세로 결국 파국을 맞는데이를 기회로 잡으면서부터 눌러왔던 감정을 폭발하는 연기, 샴페인을 터뜨리며 환호하다 바닥에 누워서 오열하는 장면은 서울판 ‘벚꽃동산’의 압권이었다.
그는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고, 그러한 열등감으로 인해 역시 입양녀에 마약중독자의 딸이라는 원초적 상처를 지닌 강현숙과의 결혼도 이루지 못하고 만다.
필자는 연극 ‘남자충동’에서 강렬한 연기뿐 아니라 연기자의 자세를 갖춘 박해수 배우를 발견했는데 그 후 연극, 뮤지컬, 영화와 드라마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는 스타로 떠올랐다. 박해수는 커리어에 맞게 연기의 강약을 살리며, 자기가 나서야 할 지점에서 활화산 같은 열정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가라앉으려는 무대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겉은 차갑지만 속은 여린 캐릭터 두식을 사나이의 체취를 풍기며 멋지게 보여주었다.

연극계의 신예 유망주로 꼽히는 남윤호 배우는 이 작품에서 박사과정을 거듭하는 운동권 캐릭터 변동림 역을 맡아 전반부에서 사이먼 스톤의 정치적 견해를 대변하듯 무력한 정부와 이윤만 추구하는 기업,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비판하는 일장 연설을 토하면서 혁명을 역설하는 회오리 같은 연기를 보였다. 그의 존재감은 도영에게 사과하고 둘째 딸 해나와 미래로 나아가는 3막과 4막에서 더 매력 있게 드러나 보였다.
모든 배우들이 고르게 자신의 역할을 소화하며 앙상블을 보여준 서울판 ‘벚꽃동산’에서 단연 돋보인 배우는 송재영 역 손상규였다. 그는 게으르고 우유부단해 황두식에게 ‘고장난 벽시계’란 지탄을 받지만 기업이 넘어갔는데도 레코드플레이어만 챙기는 아날로그 캐릭터를 고지식하게 해내며 개성을 드러냈다. 특히 자신의 무기력으로는 권력자 황두식을 당해낼 수 없자 욕만 해대는 약자 연기로 객석의 웃음을 자아냈다. 어려운 역할을 고문관처럼 밉지 않게 해낸 그의 연기력은 이 연극의 감초 같았다.
관객의 열띤 호응도로 미루어 사이먼 스톤의 한국판 ‘벚꽃동산’은 성공 그 이상의 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40세의 약관으로 고전을 현대적인 맥락으로 재해석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는 한국에서 체홉의 고전을 현대적 감성으로 재창작, 그의 역량을 작품으로 입증했다.
그가 한국을 답사해 대본을 직접 쓰고, 한국의 배우들과 작업을 거쳐 완성도 있는 작품을 내놓기까지의 과정은 물론, 이번 무대에서 활용한 연출기법 등은 국내 연극인들도 참고해 볼 만하다. 무엇보다 체홉이 진정 그려내고 싶었던 ‘벚꽃동산’의 인물 캐릭터와 관계성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난해하지 않은 연출로 한국 관객들에게 감동을 안겼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매우 크다고 본다.
AI시대에도 왜 연극예술이 필요한지를 사이먼 스톤이 입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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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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