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작에 충실한 무대...과장·허식 없는 아날로그 연기를 만나다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체홉이 그려낸 인간상의 고통·연민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준 전훈 연출의 ‘바냐 삼촌’. 한 편의 가정식 같은 맛깔진 공연이 필자의 토요일 오후를 허허로우면서도 뿌듯한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AI가 판치는 세상에서 수공업으로 빚은 순수 아날로그 연극 속에 3시간 빠져들면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느껴보았기 때문이다.
성대 앞 안톤 체홉극장에서 주말에만 공연하는 전훈 연출의 ‘바냐 삼촌’을 6월 7일 지인과 함께 관람했다. 체홉극장은 전훈 연출이 체홉의 작품만 전문으로 올리는 작은 공간이지만 체홉의 관련서로 꾸민 북카페가 있어 공연장에 커피를 들고 갈 수도 있는 귀한 명소다.
객석이 50석에도 미치지 못하니 무대도 작을 수 밖에 없지만 체홉의 대표작들인 ‘벚꽃동산’, ‘갈매기’, ‘세자매’ 그리고 ‘바냐 아저씨’로도 공연되는 ‘바냐 삼촌’까지 모든 작품을 실용적인 공간분할과 소품으로 꾸며 대극장 못지않은 아우라를 조성해왔다. 이번에도 저택의 창문을 경계로 실내와 실외에서 4막의 긴 이야기가 펼쳐졌다.

체홉극장을 즐겨 찾는 이유는 체홉 작품 해석과 공연에는 전훈 연출이 독보적이기도 하지만, 스타급은 아니라도 내공 있는 전문 배우들이 과장이나 허식 없이 아날로그 연기로 삶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고 배우에 의해 표현되고 완성된다는 것을 가장 진지하게 실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엉클 바냐’는 여러 연출가의 버전을 셀 수 없을 만큼 보았지만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번 ‘바냐 삼촌’은 원작에 충실한 무대를 보여줘 전막의 스토리와 전개 과정을 알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일꾼 포함해 9명의 배우가 맡은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였고, 체홉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 서로를 사랑하고 상처받는 사람 냄새를 물씬 풍겼다.

필자는 전훈 버전의 ‘바냐 삼촌’에서 바냐를 관극 포인트로 삼았다. 주인공 바냐 역은 체홉 전문 배우 조환이 맡아 호연을 보였다.
그는 죽은 누나의 딸인 조카 쏘냐(장희수)와 시골의 영지를 일궈왔고, 뼈 빠지게 일한 수입의 상당액을 쏘냐의 아버지 세레브랴꼬프(유태균)가 교수가 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왔다. 그러느라 결혼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은퇴한 교수와 두 번째 젊은 아내 엘레나(이음)가 영지에 오면서 일상의 리듬이 깨지고 이상 기류가 흐르게 된다.
영지에는 교수의 장모(죽은 첫 부인)이자 바냐의 어머니 마리아(김용학), 교수의 통풍 치료차 왕진 온 시골 의사 아스뜨롭(김진근), 이웃의 멍청한 지주 테레긴(박정웅), 늙은 유모 마리나(정정자), 일꾼(이찬웅)이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미모의 젊은 부인 엘레나를 두고 의사 아스뜨롭과 바냐가 구애를 하는데 엘레나는 적극적인 의사에게는 틈을 보이지만 순박한 바냐의 접근은 번번이 외면한다. 노처녀 쏘냐는 의사를 짝사랑하고...
어느 날 교수가 영지를 팔고 수익을 늘리자고 제안하자 참아왔던 바냐의 분노가 폭발한다. 쏘냐 소유의 부동산을 왜 멋대로 처리하려 드느냐, 당신의 빚을 갚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해왔는지... 분을 삭이지 못한 바냐는 권총으로 교수를 쏘지만 빗나간다. 마침내 교수 부부가 영지를 떠나면서 바냐와 쏘냐는 평정심을 되찾고 다시 일을 시작한다.

바냐를 연기하는 조환 배우를 따라가면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인생은 과연 아름다운 것인지... 뭉클함이 솟구쳤다. 교수에게 분노를 폭발시킬 때 바냐의 심정이 이해되어 가슴이 미어졌고, 교수도 마음에 품었던 엘레나도 떠난 후 창가에 넋을 놓고 허공을 보며 ‘외로워’라고 뇌일 때는 바냐가 너무 안쓰러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쏘냐 역 장희수 배우도 의사에게 차이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이 못생겼기 때문이라고 자책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일을 시작하는 꿋꿋한 모습을 연기해내 연민을 자아냈다.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 성격의 대학교수 역을 맡은 유태균 배우도 체홉극장의 단골인데, 백발로 탈색해 은퇴한 교육자로서의 깐깐한 이미지를 살리면서 실제 같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였다. 그간 여러 작품에서 노역을 주로 맡았지만, 필자는 이번 노교수 캐릭터가 그의 연기 인생에 가장 빛이 났다고 생각한다.

의사 역 김진근은 낯이 익어 찾아보았더니 배우 김진규 김보애의 아들로 미국 리스트라스버그연기학교 연극과 수료로 나왔다. 그는 시골 의사자 숲을 살리려는 환경운동가로서의 개성 있는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첫 장면을 끈적한 연기로 이끌면서 신선감을 안겨준 김진근 배우는 엘레나 이음 배우와 기습적인 러브신을 엣지 넘치게 해내 아버지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했다.
욕망이 충돌하고 이해가 엇갈리는 이 작품에서 엘레나 역 이음 배우는 젊고 아름다운 외모와 진정성 있는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잘 받쳐주었다. 복잡한 가족 구도 사이에서 감정을 컨트롤할 뿐 아니라 의사의 대시까지 밀당으로 풀어내야 하는 어려운 캐릭터를 탄탄하게 해냈다.
어머니 마리아 역 김용학, 늙은 유모 마리나 역 정정자, 좀 멍청한 토속 지주 텔레긴 역 박정용 배우도 다른 인물들과 앙상블을 이루면서 자신만의 캐릭터를 편안하게 살려냈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어딘가 외로워 보였고 성격적인 결핍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외로움은 이들의 숙명 같았다.
전훈 연출은 이 작품에 대해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충분히 아름답다”고 했다.
한데 살아내는 것이 과연 만만한가? ‘바냐 삼촌’을 보면서 인간은 참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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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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