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주년 맞는 '2024 봄 궁중문화축전' 성황리에 개최
- “창덕궁서 최초로 열린 특별전시회에 초대받아 기뻐”
- 금속공예작가들과 협업으로 부채 6점 출품해 인기
- 왕의 집무실과 세자 공부방이 전시 공간으로 처음 활용
- 전주서 방화선 부채공예연구소 운영하며 제자 양성 중
- 美·日 스페인 홍콩 프랑스 호주 등지서 해외 초대전 가져
- 고 방춘근 부채 명인 장녀로 대(代)를 이어 부채 명인 이어

인터뷰365 박현수 편집위원 = “창덕궁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궁중문화 전시회에 부채가 초대 받아 출품을 하게 된 것에 대해 무척 기뻐요. 낮이나 밤이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전시회 준비를 했어요”
1일 방화선(68) 전북무형문화재 선자(부채)장 보유자는 ‘인터뷰365’와 만나 제10회 궁중문화축전에 초대된 감회를 이같이 말했다. 그는 “전시가 끝나면 작품들은 수장고(收藏庫)에 보관돼 영원히 역사적인 문화재로 관리된다”며 “그래서 특별히 작품에 옻칠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에게 자작시 ‘부채의 전설’을 보여줬다.
‘나는 매일 내 살과 뼈로 /부채를 만든다’로 시작하는 시는 ‘나의 온 마음이 담긴 /소중한 작품들은 /내 안에 가득한 설렘과 열정, /그리고 깊은 꽃 향기 같은 /한 숨을 설움처럼 담아 /오늘도 나의 살이 되고, /또 나의 뼈가 된다’로 끝을 맺는다. 방 선자장은 “매일 이 시를 읊조리며 작업을 한다”면서 “부채는 내 살과 뼈이자 나의 모든 것이며 전부”라고 강조했다.
예전에 부채가 여름에 필수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에어컨과 선풍기에 밀려 지금은 예전 같지가 않다. 방 선자장은 “전통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어 안타깝다”면서도 “나보다 기능이 더욱 뛰어난 제자들이 많아 보람도 크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자들로 인해 전통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통 명맥 잇는 부채의 멋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재재단 주관으로 4월 27일부터 5월 5일까지 경복궁·창덕궁·덕수궁·창경궁·경희궁 등 5대 궁과 종묘 일대에서 '2024 봄 궁중문화축전'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올해 10주년을 맞은 궁중문화축전은 '함께한 궁중문화 함께할 국가유산'을 주제로 다채로운 전통문화 체험과 전시, 공연이 선보이고 있다.
특히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창덕궁에서는 전통 부채와 공예의 멋을 보여주는 특별 전시가 처음으로 열려 주목을 받고 있다. 국가의 주요한 행사가 열렸고, 임금의 공식 집무실이 이번에 전시 공간으로 활용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국보인 창덕궁 인정전은 그간 제한적으로 내부를 공개한 적은 있지만,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1일 기자가 찾은 창덕궁에서는 외국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한국 전통 정원의 진수를 보여주는 후원의 경우 매진으로 입장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인정전, 선정전, 성정각, 희정당을 찾으면 무형유산 장인들이 협업하여 '공생(共生)-시공간의 중첩‘을 주제로 작업한 부채, 병풍, 좌등 등 24점을 만날 수 있다. 1405년 태종 때 창건돼 600여 년 세월에 담긴 창덕궁과 주변 현대적인 건물의 시·공간의 공생, 즉 같이 산다는 키워드로 엮어낸 전시다.
작품들이 과거의 것 같으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을 갖는 것처럼 과거와 현대가 공생하는 시공간이 중첩돼서 현대의 작품인지 과거의 작품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다. “그만큼 전시 기획부터 준비, 작품 제작 등 과정 하나하나가 쉽지 않았다”고 이동훈 큐레이터가 보충 설명했다.
전시는 창덕궁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서 벗어나 참신한 시도를 더 했다. 예를 들어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 나라의 공식 행사를 치르던 곳인 국보 인 인정전에서는 왕이 앉는 어좌(御座)를 공간의 가운데에 두고, 이를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전통 조명인 좌등 형태를 활용한 공예품 8점을 배치했다.
국가무형문화재 한지장 보유자인 안치용 장인, 김동규 소목장 이수자, 차병갑 국가유산수리기능자 배첩 장인, 권중모 한지공예 작가 4명이 머리를 맞대 협업한 작품이다.

또 왕이 평상시 나랏일을 보거나 조정 회의 장소였던 선정전에서는 선정전 본래 쓰임 위에 과거와 현대의 언어를 뒤섞은 병풍을 선보였다. 국가무형문화재 단청장 전승교육사인 최문정과 김동규 소목장 이수자, 차병갑 국가유산수리기능자 배첩 장인, 고보형 금속공예작가가 협업으로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성정각에서 열린 부채전시가 관람객들에게 특별히 인기였다. 전북무형문화재 선자장 보유자인 방화선과 윤영숙 국가무형문화재 염색장 이수자, 김동해 금속공예가가 콜라보한 부채 작품 6점이 눈길을 끌었다. 병풍과 좌등이 큰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데 반해 부채들은 예쁘고 아기자기하며 움직임이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가까이 접하는 ‘부채’라는 소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종이 한지에 먹을 올려서 옻칠을 한 작품들로 공예 예술가들과 협업으로 부채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착시 효과를 살렸다. 성정각은 과거 왕세자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따라서 먹의 느낌과 바람과 염원, 소망 등이 넘실대는 ‘먹의 기운’을 전시 주제로 잡았다.
그래서일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부채가 날려 작품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먹의 기운과 향기가 느껴졌다.
방화선 선자장이 언제부터 어떻게 부채와 인연을 맺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는 태극선으로 이름 높았던 고 방춘근 명인의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부채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내준 부채 숙제를 한 후에야 학교 숙제를 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하지만, 부채 만드는 일에 있어서만은 그 누구보다 깐깐했던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을 때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지요”
그만큼 부채 만드는 일에 재능을 타고나기도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제일 좋아할 나이에 부채를 만들라는 아버지의 엄격함에 원망도 해보았지만, 방 선자장은 어린 나이에도 살을 제법 잘 놓아, 그 엄하던 아버지에게 칭찬을 듣는 등 일찍부터 부채 만들기에 재능을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부채 만드는 공장이 놀이터였고 덕분에 다른 길은 생각해볼 수도 없었다. 부채가 세상에서 제일 자신 있는 일이자, 부채 없는 일상들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방화선 선자장의 집은 그가 어렸을 적부터 늘 부채 만드는 일로 분주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전주는 일찍이 조선 시대 궁궐 진상용 부채를 생산했던 선 자청이 있던 고장이자 부채의 본산지다. 전주에서도 단선 잘 만들기로 소문난 방춘근 명인의 집에는 계절과 관계없이 부채를 만들어 달라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당시 방 선자장의 집에 부채 만드는 일꾼만 16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이 밤낮없이 호롱불 아래서 작업을 해야 할 정도로 수요가 많았다. 집에는 늘 부채 만드는 사람들과 부채를 주문하러 온 사람들로 분주했고, 눈길 닿는 곳곳마다 부채가 가득 쌓여 있었다.
“아버지 부채공방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160여 명쯤 됐어요. 그때는 밤낮없이 일해도 부채를 대기 힘들만큼 수요도 많았고, 그만큼 집이 늘 분주했어요. 덕분에 우리 남매들도 부채를 만들어야 했어요. 학교 숙제로 아버지가 정해준 만큼의 부채를 만들고 나서야 겨우 할 수 있었죠. 친구들과 놀고도 싶었죠. 하지만 아버지가 워낙 엄하셨어요. 특히 부채 만드는 일에 있어서는 거의 완벽주의자셨어요. 일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고, 부채 만드는 과정이 아무리 복잡해도, 일일이 다 확인하시고 전통방식을 벗어나지 않으셨어요. 부챗살 위에 티끌 하나 앉아 있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죠.”
대(代)이은 부채 외길 인생

그러나 이렇게 부채 만드는 일로 분주하던 때도 곧 지나가고 만다. 세상은 어린 방화선 선자장이 순탄하게 부채 만드는 재미를 느끼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다. 선풍기가 나오고 얼마 후에는 에어컨까지 나와 기계가 만들어 낸 바람이 세상을 채웠다. 중국에서 만든 저가의 부채마저 들어와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부채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부채만 만들어서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 거짓말처럼 찾아와버린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쯤으로 기억해요. 1970년대였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집집마다 부채대신 선풍기를 들여다 놓기 시작하는 거에요. 부채 주문이 눈에 띄게 확 줄더군요. 거기다 새마을 운동이 끝나고 전주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부채 만들던 사람들마저 거의 공단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었죠.”
하지만 고 방춘근 명인은 시대의 변화, 부채의 흥망성쇠와 상관없이 그저 묵묵히 부채를 만들었다. 방춘근 명인에게 부채는 인생 그 자체였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부채를 만들기 시작해, 한국전쟁 통에도 손을 놓지 않던 부채였다.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던 부채였다. 어렵다고 부채 만드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 남매 중에서도 방화선 선자장만이 부채 만드는 일을 놓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했다. 방춘근 명인에게 부채가 인생 그 자체였다면, 어렸을 적부터 고사리손으로 부채를 만들어 온 방화선 선자장에게도 부채는 삶의 거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를 돕겠다는 생각이나 책임감에 앞서 부채 없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이후 방 선자장은 평생을 부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거의 모든 종류의 단선부채를 되짚어보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선면에 현대적 글씨나 그림도 넣어보고, 민화를 그려 넣어보기도 했어요. 부채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새로운 일 배우기도 마다하지 않았지요.”
지금도, 대를 이어온 방 선자장의 손길에서는 전통 부채의 멋과 현대적 감각이 어우러지는 다양하고 새로운 부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방 선자장은 “먹고 살기 위한 직업과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은 다르다”며 “제자를 발굴할 때 무엇보다도 인성을 가장 중요시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밥은 먹고 살만한지를 본다”고 덧붙였다. 부채를 만드는 일만으로는 생계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안정적인 일을 가지고 있어야 부채를 만드는 일에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방 선자장은 "무형문화재라는 호칭은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기능에 주어진 것"이라며 "기능을 잘 전수해서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제자들을 양성하는 것이 꿈" 이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앞으로 더욱 열심히 부채를 만들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현재 전주시에서 방화선 부채공예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공예관에서 체험 교실을 운영하며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 스페인 홍콩 미국 프랑스 호주 등지에서 해외 초대전을 가졌으며 2007년 중국에서 한·중국제공예교류전에 참여했다. 2022년과 2023년에는 한국조폐공사가 방 선자장의 부채 작품을 소재로 무형문화재 기념 메달을 2년 연속 제작해 완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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